코스모폴리탄 도전기 ③ – 정체성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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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폴리탄 도전기 ③ – 정체성을 찾아서

1. 소수의 소수

 게이오대학교에서 나는 일본어를 배우는 수업을 주로 들었지만, 학교에서 진행하는 일반 교과 수업도 들었다. 일본교육에서의 소수자(Minorities in Japanese education)라는 수업은 일본 공교육 시스템에서 대체로 소외되기 쉬운 소수자그룹들을 사회학적, 교육학적 시각에서 다룬다. 이 수업이 다루는 소수자그룹에는 장애인은 물론이고, 재일조선인(자이니치 코리안), 동남아지역을 중심으로 전후 새롭게 이주해온 이민자들의 2세대 3세대들, 부라쿠민 등이 있었다. 부라쿠민은 일본의 특정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로서, 대체로 천하다고 낙인찍힌 직업에 종사하며 역사적으로 각종 차별을 받아온 특수한 집단을 의미한다.

 이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국이나 유럽, 미국에서 온 각종 유학생들이 다수 수강했다. 일본인 학생들도 절반정도 있었는데 모두 영어능력이 유창하고,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어린시절 학교를 다닌 경험이 있었다. 이 수업에서 나는 유일한 장애인이었을 뿐 아니라, 영어권 나라에서 수업을 들어본 경험이 없는 (아마도)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적지 않은 지체장애인들이 그러하듯이 ‘언어’를 통해 나의 신체적 제한들을 보완하는 데 능숙한 편이다. 지체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도움을 적절한 언어로 상대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어린시절부터 익히며, 의사소통 능력을 발휘하여 쉽게 소외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서고는 한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이것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나는 수업을 듣고 교과서를 이해할 정도의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일상의 맥락에서 나의 ‘장애’를 보완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구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일본 교육에서의 소수자’라는 수업에서 그야말로 소수자 중의 소수자로서 수업의 주제를 체현한 존재였다.  

 

 ‘일본교육에서의 마이너리티’ 수업에서는 도쿄대학 근처 초등학교로 현장관찰을 함께 나가기도 했다. 수업을 들은 학생들과 도쿄대 정문인 ‘아카몬’ 앞에서.
‘일본교육에서의 마이너리티’ 수업에서는 도쿄대학 근처 초등학교로 현장관찰을 함께 나가기도 했다. 수업을 들은 학생들과 도쿄대 정문인 ‘아카몬’ 앞에서.

 우리나라 대학에도 수많은 외국인 학생들이 교환학생이나 유학을 오듯이, 이제는 여러 나라와 문화권이 깊이 교류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 ‘세계공화국’의 시민권을 얻기란 제한이 많다. 어느 시대보다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도 해외여행 한번쯤 해보는 시대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정 다른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도시들을 익숙하게 탐험하는 존재들은 여전히 세계 인구의 1%도 못 미칠 것이다. 이들은 영어권에서 태어났거나 영어로 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고, 대체로 장애가 없고, 부모는 중산층 이상의 삶을 산다.
 
 나는 다양한 문화, 언어권의 학생들과 ‘소수자’에 대한 수업을 함께 들으면서도, 그 소수자성을 넘어서기란 다른 국가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체감해야 했다. 물론 수업은 꽤 유익했고 내게는 흥미로운 경험들도 많았지만, 이 경험은 ‘코스모폴리탄’을 꿈꾸는 내게 남은 높은 벽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수급자 대학생’이었던 나의 20대 시절에 대한 더 큰 아쉬움으로도 다가왔다. “조금만 더 일찍 기회가 있었다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코스모폴리탄 도전기가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소수성(minority)은 국가를 벗어날 때 더욱 중첩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국경을 넘어선 곳에 나와 같은 소수성을 만날 기회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2. 수평적 정체성

 뉴욕의 저널리스트 앤드류 솔로몬은 장애를 이른바 수평적 정체성(horizontal identity)의 하나로 규정한다. 수평적 정체성은 부모로부터 반드시 이어받지 않으며(즉 ‘수직적’이지 않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속성(장애와 같은)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서 비슷한 소속감을 느끼고, 많은 삶의 경험을 공유하는 관계의 고리가 된다. 유사한 장애를 가지고 장애인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학문적으로 다루고, 정치적, 정책적으로 고민을 진척시키는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사회만 국한할 때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수평적 정체성을 세계로 확장하면 이 집단의 크기와 밀도로 커진다. 한국의 장애인들은 많은 경우 ‘세계공화국’의 시민이 되기에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 이 공화국의 시민이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요소 역시 많아 지지 않을까?

 

게이오대학 도서관에 있는 장애관련 서적들과, 2005년부터 발간되고 있는 일본의 학술지 ‘장애학 연구’]
게이오대학 도서관에 있는 장애관련 서적들과, 2005년부터 발간되고 있는 일본의 학술지 ‘장애학 연구’_1]

 

게이오대학 도서관에 있는 장애관련 서적들과, 2005년부터 발간되고 있는 일본의 학술지 ‘장애학 연구’]
게이오대학 도서관에 있는 장애관련 서적들과, 2005년부터 발간되고 있는 일본의 학술지 ‘장애학 연구’_2]

 

 일본의 고등교육 현장에서, 적어도 게이오대학에서 나는 장애를 가진 학생을 잘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에 나와 ‘수평적’으로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적거나, 그에 관한 고민의 축적이 얕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게이오대학 도서관을 자주 이용했다. 게이오는 상경이나 법학분야가 발전한 실용주의적 학풍의 사립대학이지만, 이들의 도서관에는 한국 최대규모의 서울대도서관보다도 많아 보이는 장애학(disability studies) 서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장애학자들은 이미 2005년부터 <장애학연구>라는 학술지를 발간하여 10여 년간 성실하게 뛰어난 연구성과들을 발표하고 있다.

 한편 나는 와세다(早稲田)대학교에서 열린 한 공부모임에 초청받은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날 참석한 도쿄대 소속 한 연구자의 연구계획서를 볼 기회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이른바 자폐-퀴어이론(autistic-queer theory)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폐성장애를 가진 당사자이자 퀴어인 연구자였다. 그의 연구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짧은 기간의 일본생활에서 나는 이와 같이 ‘수평적 정체성’을 공유하는, 독특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일본이라는 사회가 그간 축적한 밀도 있는 연구결과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우리가 가진 ‘소수자’로서의 속성은 분명 ‘코스모폴리탄’이 되는 일을 방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수자적 특성은 지리적 제한을 뛰어넘어 더 많은 ‘소수자’들과 교류하고 그들이 각자 다른 문화권에서 발전시켜온 경험과 담론들을 만날 때 훨씬 풍부하게 빛날 수도 있다. 유창한 영어와 일본어 능력을 갖추지 못해서 나는 휠체어를 탄 내 몸을 사람들 사이에 녹여내는데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여전히 코스모폴리탄이 되고 싶다는 그 의미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 필자 _ 김원영 서울대 법과대학 박사과정. Ri 청년특별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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